[첫 번째 물음] 어떻게 문장을 다듬는지 읽어보았으니 우리가 직접 문장을 고쳐봅시다. 여태껏 자신이 만들어냈던 에세이 중에 하나를 고릅니다. 그리고 그 에세이의 문항 중 하나를 정해서 문장을 고쳐보는겁니다. 그리고 고치면서 느꼈던 점까지!(소감은 아주 짧아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책에서 읽었던 수 많은 조언들을 반영하면 좋겠죠?
(차이를 알 수 있도록 수정 전 문장과 후의 문장을 동시에 올려주세요.)
수정 전후
물론 종교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개인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되지도 않을 겁니다.(그렇다고 해서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더 이상 쓸모없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종교는 현실적 문제(현실의 문제)를 해결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지금껏 인류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종교는 사람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유년기적 성향을 언제든지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해주면 그뿐입니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절망과 걱정들을 종교 속에서 풀어낼 수 있게 하려면 종교를 둘러싼 수많은 자극적 요소들과 수단들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배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완전히 배제시키지(배제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을 강조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이상하고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위의 과정들은 필수적이라고(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가진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들을 많은 사람들에게(많은 사람들에게 종교가 가진 인간적인 요소들을) 알릴 수만 있다면 인간성에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현대의 세계에서 상처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느낀 점
나는 나의 글을 통해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은 ‘그럴 듯’이라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어떻게든 화려하게 꾸미고 감추고 내 것이 아닌 단어들을 억지로 욱여넣는다. 마치 현실의 내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글에서도 나의 조급함과 작위는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 그저 느낌으로만 알고 있던 나의 결함들이 이제는 조금 보이는 듯하다. 그저 남들은 그 결함들을 알아채지 못하길 내심 바랐다.
이렇게 빨갛게 표시하고 보니 내가 얼마나 하찮고 무의미한 허영심으로 차있는지 잘 알 것 같다. 문득 더 솔직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모습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수정 전후처럼 쉽게 줄을 긋고 괄호를 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자신이 고스란히 묻은 글을 수정한 것처럼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도 스스로 조금씩 수정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두 번째 물음] 책 속에는 수많은 글쓰기 매뉴얼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자신의 글쓰기에 유용하게 써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게 있을까요? 그리고 왜요?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은 시간이 흘러도 잊고 싶지 않다. 다채로운 단어사용의 기회를 박탈하는 게으른 표현들은 글 전반을 지루하고 재미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더 이상 읽고 싶지 않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효율을 중시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글까지 효율적으로 쓰려 해서인지는 몰라도 다양한 의미를 한꺼번에 포괄하는 단어의 사용이 날로 늘고 있다. 며칠 전 <봄날은 간다>라는, 무려 15년이나 된 영화를 봤다. 극 중에서 이영애는 유지태에게 “재미있는 얘기 좀 해봐요.”라고 한다. 그러자 유지태는 “저 썰렁해요.”라고 답한다. ‘썰렁하다’ 이 표현을 쓴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썰렁하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서늘한 기운이 있어 조금 추운 듯하다. ‘설렁하다1’보다 센 느낌을 준다는 뜻인데 현실에서는 재미없고 웃음을 유발하지 못하는 센스? 정도로 쓰였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농담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썰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단어를 들으면 단어의 본래 뜻을 통해 확장된 뜻까지 유추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요즘엔 ‘노잼’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요상한 단어다. 'No'라는 영어에 ‘재미’를 ‘잼’으로 줄여서 두 개를 붙였다. ‘재미가 없다.’라는 아주 단순한 뜻을 영어에 줄임말까지 더해 이상한 말을 만들어냈다. 과정은 아주 복잡했지만 뜻은 아주 간단하다. 확장의 여지가 없고 이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은 뜻을 유추해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환성은 아주 뛰어나서 아무 때나 가져다 쓰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니 중독성도 강하다.
게을러서는 절대 지적인 사람이 될 수 없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쉽고 편한 것만 생각해서는 절대 읽고 만드는 글을 쓸 수 없고,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도 완전히 다른 글이라고 느끼기 힘들기에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은 시간이 흘러도 잊고 싶지 않다.
[세 번째 물음] 우리는 책을 읽으면 꼭 글을 씁니다. 적어도 수북 안에서는 그래야하죠. 그 글은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보여주기 위한 글을 써야할 때 당신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나요? 무엇이 가장 신경 쓰이나요?
책의 말미에 보면 ‘영어는 감기고 우리말은 풀어낸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풀어낼지를 고민한다. 문장이 최대한 잘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장을 쓰고 나서 꼭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내가 만든 문장을 소리로 들으면 어떤 부분에서 어색한지 혹은 자연스러운지 비교적 금방 찾아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의 문장이 100퍼센트 자연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다. 문장을 만든 것도 나이고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듣는 것 또한 나이기 때문에.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문장은 읽어나갈수록 그림이 완성되는 모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장을 몇 번씩 읽고 되돌아가야만 그림이 완성되는 건 결코 좋은 문장이 아니라는 의견에 깊이 동감한다.
[네 번째 물음] 저는 이 책이 참 좋았습니다. 당신도 그랬나요? 책 전반에 대한 소감을 적어주세요. 책 일부에 대한 소감도 괜찮습니다.(길게 쓰지 않아도 돼요) 예컨대 ‘책 표지가 마음에 드네요.’, ‘책 사이즈가 딱임.’, ‘글씨가 커서 좋았다.’ 등등.
책의 사이즈, 글자의 크기, 표지의 재질,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끊어지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들과 그 사이를 야무지게 채우는 문장의 법칙들까지 좋은 점들이 참 많은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는 점과 더불어 나라면 어떻게 썼을지를 자연스레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다만 교정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작가가 의도한 문장의 구성과 구조까지 파악해가며 교정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했습니다. 이 책의 작가가 가진 글 솜씨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실수와 의도를 파악할만한 충분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정확하게 맞아 떨어질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을 얼마나 잘 구별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문장이 가질 수 있는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을 말하는 책이기에 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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