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 세 글자는 무슨 뜻을 갖고 있나요. 당신은 당신의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나요, 혹은 그렇지 않나요? 이름 때문에 괴로웠거나 즐거웠던 적이 있나요?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있었다면, 바꾸고 싶은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당신의 이름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내 이름에 정상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별명은 간혹 비정상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물론 오래가진 않았지만 내 이름을 들은 아이들 중 일부는 나를 그런 식으로 한번쯤은 부르곤 했다. 정상 앞에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의 ‘비’라는 말을 붙여야 별명이 완성되기라도 하듯이 꼭 비정상이라고 불렀다. 한마디씩 던지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정상을 구성하는 한자의 뜻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는 정상이라는 의미로 마음대로 바꿔 장난을 치고는 했다.
내 이름은 작명소에서 만들어준 이름이다. 대부분 이름에 ‘상’이 들어가면 相(서로 상)을 주로 쓰는데 내 이름은 湘은 서로 상 옆에 물이 붙어 있는 ‘물 이름 상’ 혹은 ‘강 이름 상’을 쓴다. 이 상에 대해 엄마와 간혹 얘기를 나누면 엄마는 매번 같은 말을 한다. “네 상은 서로 상하고 다른 상이다. 흔히 쓰이지 않는 상을 쓴 거야.”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크게 감동한다거나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 이름이 뭐 어쨌다는 거야. 흔하지 않으면 좋은 건가.’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내 이름이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은 많지 않다. 상훈이라는 이름이 흔하긴 하지만 정상훈은 그렇게 흔한 편도 아니었고 이름이 그냥 너무 이름다워서 한 번도 부자연스럽다고 여겨본 적도 거의 없다. 다만 내가 나의 입으로 “정상훈”이라고 소리내어 부를 때는 조금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살면서 그럴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도 내 이름을 부를 때 나처럼 이상한가, 그렇진 않겠지?하고 한번 쯤 걱정?하기도 한다.
바꾸고 싶은 이름은 구체적으로 없지만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간혹 한 적은 있다. 이름답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누가 들어도 이름같은 이름말고 다시 한번 소리로 내뱉고 싶게 만드는 이름. 예컨대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 이름이 ‘글리’였다. 성이 서씨였는데 그래서 모글리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나도 가끔씩은 이름이 참 특이하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지금은 이름같지 않은 그 이름이 부러운가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일이라면 비교적 쉬운 일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름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름을 바꾸는 데는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 않으니까 자기가 예전부터 원하던 이름이나,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으로 많이들 바꾸는 것 같다. 새로워질 것을 기대할테지, 그게 나를 대하는 나의 모습이든 나를 대하는 상대방의 모습이든. 그런 기대로 가장 먼저 혹은 가장 결정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개명이라면 이름을 바꾸는 건 결코 작거나 사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한 모세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모세씨의 입장에서 소라 나나 나기 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지, 적어주세요. 꼭 모세씨의 입장에서 쓰는 편지 형식이 아니어도 되고, 모세씨는 이런 생각이었을 거다. 이렇게 살아갈 것 같다.와 같은 형태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어쩜 모두 약하고 비슷한 소라나나나기에게 모세씨는 너무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었는지 모르죠. 이런 모세씨의 입장을 우리도 함께 생각해보자구요.
모세는 아주 많이 답답할 것이다. 차라리 이해가 되지 않으면 마음이 지금보단 편했을 것 같은데 나나가 이기적인 것 같다고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니까 더 답답할 것이다. 나나가 조금만 덜 이기적이라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 기대감으로 모세는 나나의 집 앞에도 찾아가고 나기의 삯에도 찾아가서 몸으로, 말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느끼는 건 순전히 모세의 착각이다. 나나와 모세가 나눈 대화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애초에 둘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평범하지 않아서 그걸 평범으로 착각하거나. 하지만 ‘평범’이라는 두 글자는 진짜 평범을 앞에 두고서 보기 좋게 어긋나버린다.
어쩌면 약한 사람은 모세이고 강하고 단단한 사람들은 소라나나나기였다고 느껴진다. 모세는 평범의 범주 안에서 머무르고자 고군분투한다. 수순을 중요하게 여기고 아기가 입게 될 사회적 대미지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소라나나나기는 평범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애쓰지 않는다. 그저 계속 살기만 하면 괜찮다고 여기면서 산다. 그래서 그들은 강하다. 세 명 모두가 온전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음을, 하지만 그게 건강하지 않은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확신한다. 그들이 해봤기에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고 있으므로, 매순간 증명하고 있으므로 그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모세는 두렵다. 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주길 바란다.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범주,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꾸릴 수 있게 도와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소라나나나기를 보며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위태로워진 사람은 모세다. 모세는 아마 절대 소라나나나기모세가 되지 못할텐데 본인도 분명 그걸 아는데, 적어도 나나만큼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나가 품고 있는 생명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번과 비슷한 질문입니다. 이번엔 애자입니다. 애자는, 금주씨가 죽은 그 날 이후 사람이었을까요? 애자는 소라와 나나에게 정말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애자에 대해 애자가 소라와 나나에게 무슨 말을 자꾸만 하려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적어주세요.
애자는 이미 예전에 죽은 사람이다. 이름이 모든 걸 이야기해준다. 사랑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냥 단순히 안개처럼 사라진게 아니라 다져지고 짓이겨지며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진 사랑이라면 그래서 못하게 돼버린 거라면 애자는 더 이상 살수가 없다. 죽은 게 맞다.
애자는 덧없고 부질없고 애쓰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 이기적이다. 너무나 결과론적인 결론이라는 점에서 그저 계속해보고 있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 속에 살고 있는 소라나나나기에게는 절대 울림을 주지 못할 것이다. 소라나나나기는 본인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결코 계속해보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금주씨가 죽은 이후부터 애자씨가 죽은 이후부터 계속 해오던 일이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 애자가 소설 속에서 했던 말 중에 진실이 아닌 건 없었다고 난 확신한다. 사랑이 이름이었던 애자에게 사랑이 없어진 이후의 삶은 덧없고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잘 살고 있는 듯 느껴지는 두 딸들에게 애자는 “행복하니, 왜 너희만 행복하니.”라고 묻는 것은 아마 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왜 나는 행복하지 못하니.”, “왜 나는 너희들처럼 하지 못했니.”
나나가 나기에게 토해내는 물음들(182)을 읽으며, 나나의 손을 꼭 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나에게 괜찮다고, 하찮은 위로는 건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러쿵저러쿵, 세계라는 것을 살아가는 건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나나는 계속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받을 사회적 데미지, 혹은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는 우리들,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나는 계속해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지의 표현이나 희망찬 다짐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약하디 약한 존재가 삶을 견뎌내는 마지노선일까요? 나나의 터져나오는 물음들, 나나가 반복해서 말하는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말에 대해 여러분이 느낀 것을 적어주세요. 그리고 나나가 던지는 물음들에도 답해주세요.
나나는 ‘계속해보겠습니다.’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삶이라는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은 ‘살다’의 명사형이다. 삶은 그냥 사는거다. 삶의 핵심은 어쩌면 큰 목표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고 그저 산다는 것이다. 나나의 외침은 삶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나에게도 잔잔하지만 묵직한 진동을 느끼게 했다. 소라나나나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계속하는 건 생각보다 아주 많이 어렵거나 어쩌면 불가능한 걸지도 모르는데 그 일을 차분하고 묵묵히 해내고 있었기에 대단하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나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나라면 그리고 주변에 소라와 나기가 있다면 태어날 아이는 분명 소라나나나기보다 더 행복할거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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