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알던 기존의 극과는 다릅니다. 황당할 수도, 흥미로울 수도, 별생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 든 생각을 알려주세요. 책에 대한 감상문이 되겠네요.
-
저에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언제나 포함되어 있었던 책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사실은, 이 책의 갈래가 희곡이라는 것을 책을 빌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얼마나 인생을 대충 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소소하고 재미난 경험이었습니다.
책을 빌릴 때까지만 해도 아주 뿌듯하고 마음이 꽉 찬 느낌이었습니다. 훌륭한 고전을 읽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치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지식인이라도 된 것 마냥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꽤 기분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책의 분량도 길지 않아서 속성으로 고전 한권을 섭렵할 생각을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습니다. 물론 책을 펼치고 나서는 완전 생각이 바뀌었지만...
‘과연 이것을 무대로 옮기는 게 가능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대로 된 대화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길지 않은 대사들이 오고 갔지만 주고받는 대화들이 너무 이상하고 비상식적이어서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공되는 정보가 너무 빈약해서 한동안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성별조차 헷갈렸습니다. 저는 어느새 책 속에 내가 발견하지 못한 정보들이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들을 찾는 것에 혈안이 돼있었습니다.
정보에 대한 강박은 2막이 시작되고서는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고서 계속 됐던 그 정신없던 순간들이 저를 지치게 만들었고 1막을 읽어내는 동안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이 책에 대한 나름의 예상과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막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책의 존재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습니다. 1막과 2막은 비슷하면서 아주 많이 다릅니다.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포조와 럭키가 찾아오고 곧 떠나고 마지막엔 고도의 소식을 전해주는 소년과 블라디미르의 대화. 2막을 통해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도를 기다려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어제는 기다렸는지, 만약 고도가 나타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것처럼 행동하며 지금 하고 있는 기다림이 얼마나 길게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블라디미르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반면 에스트라공은 어제 만났던 포조와 럭키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포조와 럭키 역시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블라디미르와 대화하고 이후 등장하는 소년 역시 1막에서 보여주었던 일종의 확신?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고 쭈뼛거리고 주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장 이성적으로 보였던 블라디미르에게 점점 불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블라디미르를 보며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모든 게 뒤엉켜 버린 게 아닐까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엉켜있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제 이 지랄을 그만하자고, 이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일도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릴 것 같습니다. 그것은 멋지게 보이다가도 한순간에 아주 무섭게 느껴집니다.
2] 이 책의 등장인물,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립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 그들은 왜 기다리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조차 잊어버린 듯합니다. '고도'를 만나면 그들 인생은 어떻게 바뀌는 걸까요? 대체 '고도'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기다리는 걸까요? 여러분 각자가 생각하는 '고도'는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기다림의 대상, '고도'는 무엇인가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자연스레 안 써주셔도 괜찮습니다.).
-
그들은 고도를 만나더라도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겁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조차 모르는데 고도가 나타난다고 한들 과연 바뀌는 게 있을까요? 어쩌면 고도는 이미 그들을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저에게 있어서 고도는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저도 잘 모르겠어서 설명을 잘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대상이 오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오지 않았다는 건 완전하지 않다는 얘기일겁니다. 결국 지금의 나는 아직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완전하지 못한 나이고 언젠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오길, 내가 되길.
[3] 책장을 넘기면서 무언가 나오겠지, 진행되겠지, 반전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국 마지막 장까지 허무하게 넘겨버렸습니다. 기다림은 두 주인공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었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고통받기 시작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는 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행복한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무언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기다리지만, 그 끝은 책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듯 생이 끝나는 죽음밖에 없으므로 깊게 생각하지 말고 '대충 살아라, 하고 싶은 말, 행동 다 하면서 살아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너무나 수동적인 두 주인공과는 다르게 삶의 의미를 알아가기 위해 '고도'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둘 중 더 바람직한 삶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둘 다 의미가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최대한 자유로워진 상태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끝없이 의미를 찾아가면서 때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그 요건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삶이 모두 힘들고 유의미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한 삶은 어쩌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선택에 대해 끝까지 믿음을 가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선택에 대해서도 조용하지만 온전한 신뢰를 보내줄 수 있는 삶이라면 더 좋겠죠.
에세이를 쓰면서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는데... 보시는 분들은 아마 더 혼란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책, 저는 마음에 들었구요. 또 읽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혼란한 에세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 bokgi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bokiree) (0) | 2016.07.10 |
---|---|
계속해보겠습니다(bokiree) (0) | 2016.06.26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bokiree (0) | 2016.05.21 |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bokiree (0) | 2016.05.07 |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0) | 2016.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