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bokgil

마음을 흔드는 글쓰기

복길 2017. 2. 11. 21:37

[1] 첫 번째 질문


당신이 사랑한 소설은 무엇인가요?”

  우리 수북 모임의 독서가들은 소설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다고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그동안 여러 번의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가 어떤 소설을 가장 사랑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이번 기회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한 편을 소개해보면 어떨까요아직 사랑할 만한 소설을 만나지 못했다면가장 재미있게 읽었거나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을 소개해도 좋습니다내용은 <마음을 흔드는 글쓰기>에 담긴 부분들을 기초로(: 줄거리, 서술, 공간갈등의 전개와 해결주제 등) 자신이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이유(재미있게 읽은 혹은 기억에 남게 된 이유)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기술하시면 됩니다에세이 분량이 많지 않으니이유는 하나 또는 두 개만 정해 작성해주세요.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한글과 한문, 일본어가 혼용된 글을 사용하던 시절을 지나 온전한 한글을 배우며 자란 세대가 만든 첫 한글세대 소설. 흔히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키며 등장한 괴물 신예작가 김승옥. 나는 김승옥의 단편집 <무진기행> 중에서 "염소는 힘이 세다"라는 단편을 사랑한다. 


처음 제시한 문장은 시작부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중간에서 계속 반복된다. 문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반대로 집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힘이 세다는 것이 그것이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였고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누나가 있지만 누나 역시 성인이 되지 못했다. 주인공인 소년은 그 중에서도 가장 힘이 약하다. 


어느 날 염소가 죽었고 돈이 필요했던 할머니는 그 염소를 음식으로 팔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밖에 있는 힘센 것들이 힘센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우리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염소로 만든 국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하층민의 남자들이다. 주로 몸을 써서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키가 크고 팔이 굵고 가슴이 두껍다. 입 역시 거칠고 정제되지 않아서 집 안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돕는 누나에게 슬쩍슬쩍 농짓거리를 한다. 소년은 그 농담을 알아들을 듯도 하지만 잘은 모르겠다. 염소가 죽어버린 이후로 집의 안과 밖은 확실한 힘의 경계가 되어 버린다. 그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작은 소년이고 육체적, 정신적 힘이 아직은 부족한 소년은 그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저 관찰할 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다.


소년의 입장에서 장면들을 따라가고 관찰하다보면 독자 역시 무력감을 느낀다. 집에 국밥을 먹으로 올 때마다 누나에게 심심한 농담을 던지던 사내가 어느 날 집 안 구석에서 누나를 겁탈하는 장면을 발견하고도 소년은 결국 아무런 행동도 실행하지 못한 채, 그저 가끔씩 그 남자를 어떻게 하면 죽여버릴 수 있을지 작은 소리로 논의할 뿐이다.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시절. 먹고 사는 문제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민마저 '0'이 되어 버렸던 시절.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차갑고 예리한 현실 속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무력함, 처연함을 아무런 결정도, 행동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염소는 힘이 세다"   순우리말의 문장을 통해 살아본 적 없는 시대의 공기로 호흡할 수 있게 하는 김승옥의 천재성이 새삼 보물처럼 느껴진다. 




[3] 세 번째 질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요?”

  소설과 영화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도 많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읽은 책은 소설을 쓰는 것에 관한 책이었지만, 많은 내용들이 영화라는 분야에도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서술의 속도와 장면 연출). 그런 의미에서 영화 한 편을 분석(또는 비평)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기본적으로 책에 소개된 요소들을 기반으로 분석해주세요 (배우의 연기 자체에 대한 분석은 삼가주세요). 이 외에 다른 부분들에는 제한을 두지 않겠습니다. 만약 에세이 내용상 자신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면, 미리 단톡방에서 의견을 물어본 후 결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 <가장 따뜻한 색, 블루>


18~19세로 보이는 소녀, 아델의 시선으로 그녀가 겪는 격렬하고 거친 파도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아델은 나이와 어울리게 거침이 없습니다. 음식 앞에서는 겉모습을 신경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식사를 하고 잠을 잘 때도 내 몸이 어떤 모양이 될지 고민하지 않고 침을 흘리며 자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속에서 입이 식욕의 메타포이자 성욕의 은유인 것처럼 아델은 사랑과 섹스에 있어서도 거침없고 솔직합니다. 그런 아델에게 관객은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영화 속에서 아델이 자주 등장한다는 이유로 관객이 아델을 내면화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감독의 확실한 연출의도가 있습니다. 영화 속 아델은 피부의 잡티 하나까지 다 보일 정도로 가깝게 보입니다. 더 당길 수 없을만큼 카메라가 아델을 줌인 하고 있기 때문이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런 클로즈업이 계속 되다보니 관객은 영화를 보면 볼수록 아델과 친해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또 아델이 쳐다보는 것을 관객이 쳐다볼 수 있게끔 연출해 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델이 무언가를 쳐다보면 카메라는 곧 그것이 무엇인지를 비춰줍니다. 하지만 아델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엠마라는 캐릭터에게는 이 연출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아델을 자기화 시키고 아델이 아닌 인물에 대해서는 대상화 시켜버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델이 사랑하는 여인은 영화 중반 전까지는 파란머리(엠마)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과도 관련이 있죠. 그 푸르른 사랑의 대상 속에서 아델은 거침없이 헤엄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기면서 파란머리의 엠마는 머리를 노란색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 시점부터 그 파란색은 고스란히 아델에게로 옮겨 갑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아델에게 파란색을 덧씌우기 시작합니다.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아델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도 그것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종반부에 아델이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지 못하고 그저 떠있는 장면은 아직도 과거 엠마의 푸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렇다고 자유롭게 헤엄치지도 못한 채, 부유할 수 밖에 없는 아델의 상실감과 공허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영화의 모양새나 형식이야기를 빼고도 이 영화 속 등장하는 사랑과 성장은 부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충분히 실험하고 내던져도 괜찮은 사회에서 사는 아이들의 삶이 저런 것이라면 그렇지 못한 삶 속에서 그저 버둥거리기에 급급한 우리의 아이들은 얼마나 불쌍하고 안쓰러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는 사랑이 인간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그치지 않고 한번쯤 '내가 삶에서 아델처럼 저렇게 용감했던 적이 있었나' 하고 반문하게 만듭니다.



보너스(지만 모두가 답할) 질문


당신이 사랑한 문장은 무엇인가요?”

  마지막으로늘 기억하고자 하는 소설 속 문장 또는 장면이 있다면소개해주세요.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고, 다투고 그러지. 

서로 다른 시간에, 지점에 놓인 전망대에서 저 멀리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야."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름'을 전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매순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노력하는 만큼 잘 되진 않지만 다름이 주는 신선함과 당혹감을 즐기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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