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째 질문
로자와 모모는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로자는 유태인, 모모는 회교도이죠. 이 두 종교는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갈등, 나아가 죽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다른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고 구사할 줄 압니다. 로자는 회교도의 언어로 모모에게 되묻기도 하고 모모는 유태인들의 기도문을 함께 외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두 사람의 종교를 다르게 설정했을까요? 회교도와 유태인을 한 집에 살게 하면서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그들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같이 차별의 대상들이다. 모호한 성별을 지닌 사람, 직업이 창녀인 늙은 노인, 회교도의 어린아이,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와 차별로 가득찬 그 7층짜리 아파트에서는 큰 싸움 한번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의지하고 끈끈히 연대하며 돕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별과 무시, 그로인해 벌어지는 끝없는 죽음들이 적어도 그 곳에서만큼은 멈춰 사라져버린 듯하다. 10년 만에 아들을 찾아온 정신병자 친아버지는 모모의 종교가 회교도가 아니라는 로자의 거짓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아무리 내 핏줄이라고 해도 회교도가 아니라면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고 소리치는 남자를 보며 우리는 코웃음을 치지만 그 아래에는 아주 무거운 씁쓸함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시종일관 존재를 강조한다. 종교, 인종, 나이, 직업, 성별보다 결국 존재가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듯 느껴진다. 내가 존재하고 내 옆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로자는 모모의 나이를 속이면서 보여주고 모모는 죽은 로자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고 연신 향수를 뿌려대는 행위로 보여준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존재 속에서 행복하려고 애쓰는 삶은 소설 속 삶처럼 왜 이리도 슬프고 고될까.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책의 발문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
[3] 세 번째 질문
현재의 나이대로 살고 있는 당신이 알고보니 4살이나 더 많은 나이의 사람이었다면 각자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아주 동안이 될 겁니다. 예전보다는 아니지만 지금도 종종 나이보다 덜 들어보인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32살에 이 얼굴과 이 몸상태라면 신체조건으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울 듯합니다. 삶에 있어서 생각해보자면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27살이든 32살이든 나는 나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갑자기 나타난 4년이란 시간이 지금껏 살아온 나의 인생을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어제 원했던 걸 오늘도 원할 것이고 그 원하는 것들을 위해 아주 작은 걸음을 하려고 애쓸 뿐이겠죠. 다만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4살이나 더 먹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하지 않는 나에 대한 걱정을 남들이 해주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나를 걱정하는 것보다 나를 훨씬 더 많이 걱정해 줄 때가 있어 보입니다. 나 대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걱정을 줄여주기 위해 그들의 해법에 맞춰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의 맛을 알기 위해서만 움직이면 된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되는 것보다, 그렇게 되리라 믿는게 더 중요할 때가 있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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