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이유
아주 재미있는 소설책을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들을 함께 읽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주제들이 '청년 자살', '인터넷 댓글 부대', '헬조선 탈출', '에반게리온 덕후' 등등 이어서.. 함께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평소 읽어보고 싶었던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선택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초기 의도 딱 맞게 이 책을 읽는데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빠르게 읽히지만,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 초여름에 딱 맞는 소설이었습니다. 왜 여름에 어울린다고 했는지는 읽어보시면 알게되실거에요(혹 아닐지도...)
함께 읽고 나누며 긴 여름의 시작을 즐겁게 맞이해 보아요!
책
모든 존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몫만큼 애써 살아가고 있다.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2012년 가을호부터 2013년 여름호까지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으로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했던 작품으로 연재 종료 후 일 년여 동안 개고하여 책으로 펴냈다.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존재하는 소나, 나나, 나기 세 사람의 이야기를 각각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소설은 서정의 곁을 이어가면서도 잔잔하게 흘러가 폭발적으로 파급되는 황정은식 서적의 마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인생의 본질이 허망한 것이라고 세뇌하듯 이야기하는 어머니 애자의 곁에서 소라와 나나는 관계와 사랑, 모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자란다.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멸종하기를 꿈꾸는 소라와 사랑을 경계하는 나나. 두 사람은 나나의 임신에 당황한다. 사랑의 폐허에서 자란 그녀들에게 임신을 하는 것이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저 두려운 일일 뿐이다. 세상이 언제 망하든 개의치 않을 것 같던 나나와 소라는 평생 벗어나지 못한 황막한 폐허에서 꽃을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작가
이 소설가의 이름은 황정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책날개에는 약력이나 작가 소개 하나 없이 이름 세 글자만 적혀 있다. 그거면 모든 설명을 다 했다는 듯이. 소설에도 해설이나 작가의 말이 딸려 있지 않다. 소설뿐이다. 등단 후 두 권의 단편집을 내고, 세 번째 장편을 내는 순간에 와서 황정은은 그저 황정은이 되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서, 책이 많이 팔려서, 많은 문학상을 수상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소설가도 아닌 오직 황정은만 쓸 수 있는 소설을 써왔기 때문이다. 첫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부터 <야만적인 앨리스씨>까지 황정은의 소설을 읽어왔다면, 그저 황정은의 소설이라는 이유로 <계속해보겠습니다>를 펼쳐 드는 게 당연한 일이므로. 황정은은 그런 소설을 써왔다.
(출처 : 웹 매거진 아이즈 윤이나 칼럼리스트 글 中,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4120821187232893)
(1) 소라나나나기
7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蘿. 본래 열매 라蓏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간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가 되었다. 생전에 미나리를 즐겨 드셨다고 하니 실수고 뭐고 다만 취향의 반영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라(蘿)와 라(蓏)는 형태 자체가 다르지 않아? 도저히 헷갈렸다고는 할 수 없는 글자들이잖아요, 할아버지.
86
나나입니다.
말해보겠습니다.
나나娜娜라고 씁니다. 앞 글자도 뒤 글자도 나娜.
나, 라는 글자가 두 번이나 반복되어서 나나. 앞으로도 뒤로도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아홉 가운데 여덟의 확률로 애자입니다. 애자답다,라는 것은 소라의 의견이고 애자가 지나치다,라는 것이 나나로서 당사자인 나의 생각입니다. 애자의 함량이 지나치게 높은 이름인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나라고 말해도 나. 나나라고 말해도 나.
나나라는 이름은 나나라고 말하기에 좋습니다. 소연이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소연이는, 소연이가,라고 말하거나 연숙이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연숙이가,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매끄러운 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따금 나나라고 자칭합니다.
168
나는 나기.
나기의 나는 나鏍, 가마솥이라는 글자. 나길에서 ㄹ의 탈락으로 나기가 되었다. ㄹ을 너무 아래쪽에 쓰는 바람에,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출생을 신고하러 간 쪽은 내 아버지였는데 만취한 상태에서 길을 기로 보았고 자전을 끌어당겨 첫 번째로 등장하는 한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나의 한자 역시 나,에 해당되는 페이지를 펼치고 아무 글자에나 손가락을 짚어 베껴썼을 것이다. 사정을 알게 된 내 어머니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시장 일이 너무 바빠 이름을 고치러가지 못했고 나는 그대로 나기가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
언젠가 학교 선생으로부터 네 부모는 자식에게 어째서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러면, 이라고 생각하며 자전을 뒤져보았는데 나, 라는 한자에는 어차피 좋은 뜻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글자가 별로 없었다. 나는 나기. 이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만취한 아버지가 센스를 발휘해 만든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그정도로 괜찮다. 무쇠로 만든 그릇.
나기의 나는 나鏍, 가마솥이라는 글자.
기基라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세는 단위일 것이다.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 정도 의미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당신의 이름 세 글자는 무슨 뜻을 갖고 있나요. 당신은 당신의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나요, 혹은 그렇지 않나요? 이름 때문에 괴로웠거나 즐거웠던 적이 있나요?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있었다면, 바꾸고 싶은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당신의 이름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2)모세씨가 소라, 나나 혹은 나기에게
108
모세씨는 본래도 말이 별로 없지만 이렇게 집에 있으니 더욱 말이 없습니다. 생기가 사라져서 인형 같은 모습입니다. 간간이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고 모세씨의 아버지도 모세씨의 어머니도 나나도 말이 없습니다. 이따금 과일을 집어 먹으며 잠자코 있습니다. 모세씨의 어머니가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켭니다. 웃음소리가 요란합니다. 주말 저녁의 버라이어티쇼입니다. 넷이서 쇼파에 푹 파묻히듯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봅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이 고급 소파는 명백하게 텔레비전을 향해 놓여 있구나. 세사람에겐 이 각도와 이 순서와 이 전개가 익숙하구나.
119
집으로 모세씨를 불러들여 소라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나나의 세계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모세씨와 만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기 오라버니만이 접근하고 접촉할 수 있었던 그 세계를, 금주씨의 죽음과 이미 상당히 죽어버린 애자와 뒤틀림이 담긴 세계를 열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나나의 내면에서 그 부분은 잠잠한 듯 보여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곳. 가장 민감한 비늘이 돋은 곳. 무엇보다도 나나는 소라를 애자를 나나 본인을, 실제라기보다는 나나 내면의 그들을 모세씨에게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좀처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라고 생각하는 마음과 부숴버리자, 그만 깨버리자고 생각하는 마음과 그밖의 마음이 뒤섞여 최근에 나나의 내면은 꽤 시끄럽습니다.
131
일요일에 애자를 보러 가요.
그렇게 말하자 모세씨는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은 그만두면 안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묻자 어머니를 애자라고 부르는 것, 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듣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냐고 대꾸하고 애자는 애자,라고 생각합니다. 애자는 애자라고 불러야 애자다우니까 애자라고 부를 수 밖에 없지,라고 심술 반, 왠지 잘난 척 반을 섞어 생각합니다.
147
요강요. 모세씨의 어머니가 그것에 관해 좋다거나 싫다거나 말한 적은 없었나요,라고 묻자 모세씨는 달걀노른자 부스러기가 달라붙은 입을 우물거리며 한동안 나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없어요.
없어요?
네.
없어요,라고 말하는 모세씨에게 모세씨는 궁금한 적 없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요강을 남의 손으로 비울까, 어머니는 왜 남의 요강을 비울까, 그런 걸 묻고 대답을 듣고 싶었던 적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남이라뇨, 하고 모세씨가 말했습니다.
남이라고 할 수 있나.
남이 아니에요?
어떻게 남이죠?
남인데.
가족인데.
가족은 남이 아닌가요?
남이 아니죠.
단호하게 말하고 모세씨는 포크로 찍은 당근을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었습니다. 그 모습이 유별나게 낯설어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남이 아니라니 모세씨는 진심인걸까. 남이 아니라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알 필요도 궁금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나나는 모르는것투성이인데. 애자에게도 소라에게도 나기 오라버니에게도 지금 이 순간 모세씨에게도, 모르는 것이 잔뜩인데. 가족이라도, 모르는것투성이.
그러면 모세씨는요? 모세씨도 가족인데, 모세씨도 요강을 비워본 적 있나요.
.......왜 그런 걸 자꾸 물어요?
궁금해서요.
모세씨는 한숨을 쉬면서, 등받이 쪽으로 푹 꺼지듯 기대앉더니 부부잖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잖아요,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말을 끝으로 이제 이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탁자 쪽으로 몸을 당기고 왕성하고도 완강하게,샐러드를 먹었습니다. 나나는 접시에 놓인 올리브를 포크로 굴리며 내려다보았습니다. 모세씨에게 부부는 그런 것, 하고 생각합니다. 모세씨에게 가족은 그런 것, 남이 아닌 것. 그러면 나나도 모세씨의 가족이 되면 남이 아니게 되는 걸까. 모세씨네 이상한 텔레비전 시청. 그것은 시청이라고 해야할지 대화라고 해야 할지. 나나도 언젠가는 텔레비전을 향해 말하게 되는 걸까.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을 향해 묻고 텔레비전을 향해 대답하는, 어쨌든 남이 아닌 사람들. 보통의 가족이란 그런 걸까. 나나와 소라는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걸 모르는 것뿐일까. 하지만......
하지만, 하고 생각합니다.
애자의 일은 비밀로 하자고 했으면서.
애자가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모세씨의 부모님에게 비밀로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면서. 그것은 어째서일까. 남도 아니고 가족이라서 배설물을 맡기는 것은 괜찮다고 하면서, 왜 애자는 비밀이 되어야 하는 걸까. 왜 나나는 애자를 비밀로 해야 하는 걸까. 그게 왜 좋은 것이 되는 걸까. 이런 것을 모세씨는 왜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걸까. 빈손으로 나이프를 쥐었다가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느낌에 섬뜩해서, 도로 내려놓고 두 손을 무릎에 올렸습니다.
아까부터 토라진 듯한 얼굴을 하고 묵묵히 샐러드를 먹고 있는 모세씨를 모세씨, 하고 불렀습니다.
모세씨는 나하고 틀림없이 결혼할 생각인가요?
네.
아이가 있으니까?
그게 수순이기도 하고요.
수순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모세씨에게 당연하지 않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모세씨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157
나나씨, 내가 싫어요?
싫어졌습니까,라고 모세씨는 물었습니다.
......아뇨.
그럼 나하고 살아요.
싫어요.
가족이 되어야조,라고 모세씨는 말했습니다.
모세씨.
........
좋아해요.
........
하지만 모세씨가 바라는 가족은 될 수 없어.
........나나씨는 이기적이네. 자기 생각만 하고 있어. 아이는 어떡하고요. 아이가 자라면서 받게 될 사회적 데미지는 어떡하고요.
데미지라니, 이상한 순간에 영어를 사용하네......귀여워,라고 생각한 순간 어깨를 잡혔습니다.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모세씨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가칫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모세씨의 엄지가 견갑골을 찌르듯 눌렀으나 압도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모세씨의 눈을 들여다보느라고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우린 어떡해요, 모세씨는 말했습니다.
나나씨는 아이를 아버지 없이 기를 작정입니까. 내가 있는데? 아버지가 있는데? 내 아이인데? 나도 아이에 관해서는 권리가 있는데? 나는 어떡하라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무슨 관계인거죠? 무슨 관계가 되나요? 아이도 있는데, 결혼하지 않고? 번갈아가며 키우나? 나나씨는 그런 걸 원하나요? 그게 무슨 가족이야? 그게 말이 되나요? 말이 되나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되냐고.
모세씨의 손에 양쪽 어깨를 비좁게 잡힌 채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딴에는 다만 어깨를 필사적으로 잡은 것뿐인지도 몰랐으나 두 개의 엄지가 목을 강하게 파고 들어 숨이 막혔는데 모세씨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차츰차츰 더 강하게 힘을 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160
나나야, 야 나나를, 가만두지 않겠다, 야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가만히, 라고 귀신처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
제대로 말해야지,라고 생각한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니야,라고 불러버렸던 것입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186
당신은 나나씨를 사랑합니까.
사랑?
나나씨가 당신을 사랑합니까.
나는 조금 생각을 해보고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나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나나를 사랑하지. 그렇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아. 그렇게 말하자 그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은 어떤 사랑입니까.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보는 사람이었다. 이쪽을 보고 있는데도 보고 있는지 의심이 들어 그 눈을 자꾸 보게 되는 사람. 나나는 이런 사람과 어떤 장소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남녀 사이에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닌 사랑은 없습니다. 지금 그렇지 않더라도, 나중에라도 남녀 사이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저씨.
.........
아저씨.
.........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한 모세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모세씨의 입장에서 소라 나나 나기 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지, 적어주세요. 꼭 모세씨의 입장에서 쓰는 편지 형식이 아니어도 되고, 모세씨는 이런 생각이었을 거다. 이렇게 살아갈 것 같다.와 같은 형태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어쩜 모두 약하고 비슷한 소라나나나기에게 모세씨는 너무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었는지 모르죠. 이런 모세씨의 입장을 우리도 함께 생각해보자구요.
(3) 애자가 소라와 나나에게
10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 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12
애자는 나나와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뒤,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
44
새끼를 먹여본 손맛.
그것을 언제고 내가 가지게 되는 날이 올까.
나나는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벌써 예비 단계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순자씨의 도시락을 먹던 시절엔 나나도 나도 작았지. 이제는 작지 않다. 나나도 나도 더는 작지 않아.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 흐름에 실려 나는 자랐고 나나도 자랐다. 다 자란 나나는 이제 엄마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미 엄마인지도 모른다. 새끼를 먹여본 손맛. 그걸 갖추게 되는 순간도 오겠지. 언제고 오고 말겠지.
하지만 내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회로가 그렇게 꼬여 있다. 생각이 아니고 심정의 영역에서.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104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라고 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3번과 비슷한 질문입니다. 이번엔 애자입니다. 애자는, 금주씨가 죽은 그 날 이후 사람이었을까요? 애자는 소라와 나나에게 정말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애자에 대해 애자가 소라와 나나에게 무슨 말을 자꾸만 하려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적어주세요.
(4) 계속해보겠습니다
182
있잖아, 하고 나나는 말한다.
이기적인가 나는.
이기적인가. 모세씨가 나더러 그랬어. 이기적인 사람이래. 아이가 받을 사회적인 데미지라나 그런 걸 왜 생각해보지 않느냐고 했는데 나는 정말 그런 걸 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생각을 덜 했으므로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내가 무언가를 각오했다는 이유로 아기까지 무언가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러쿵저러쿵, 세계라는 것이 있으니까. 아니 도대체 세계라는 것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잖아. 세계는 어때? 괜찮아? 아기를 낳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괜찮아? 나를 왜 태어나게 했어, 아기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저기,인간의 수명은 보통 팔십년이잖아. 그런데 내내 불행할 뿐이라면 어쩌지? 나 때문에 태어난 아기가, 삼십년이고 사십년이고 불행할 뿐이라면 어떡하지? 괜히 태어났어,라고 생각한다면? 생각하고 생각해도 생각할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더 생각하고 싶은데, 그런데 생각을 더 하다보면 이렇게 더 생각하는 것이 좋은가, 정말 좋은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돼. 있잖아, 모두들 어떻게 하는 걸까. 모두들 어떻게 아기를 만들어? 어떻게 아기를 낳아? 모두 이런 걸 부지런히 생각하며 아기를 만드는 거야? 실은 모두들 부지런하게 이런 걸 고민한 결과로 아기를 낳고 살 결심을 하는거야?
227
애자는 요즘도 밤에 전화를 걸어옵니다.
가엾게도.
애쓰지 마.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아기는 이제 잠잠합니다. 소라도 오라버니도 잠을 자느라고 편안하게 숨 쉬고 있습니다. 모두 잠들었습니다. 어둠속에서 그들의 기척을 듣습니다. 오래지 않아 날이 밝을 것입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나나가 나기에게 토해내는 물음들(182)을 읽으며, 나나의 손을 꼭 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나에게 괜찮다고, 하찮은 위로는 건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러쿵저러쿵, 세계라는 것을 살아가는 건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나나는 계속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받을 사회적 데미지, 혹은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는 우리들,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나는 계속해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지의 표현이나 희망찬 다짐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약하디 약한 존재가 삶을 견뎌내는 마지노선일까요? 나나의 터져나오는 물음들, 나나가 반복해서 말하는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말에 대해 여러분이 느낀 것을 적어주세요. 그리고 나나가 던지는 물음들에도 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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