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을 읽으며 다시금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막연한 동의를 얻은 느낌입니다. 삶이란 높낮이와 상관없이 그 보편성을 관통하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다간 평생 그게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게 될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문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학 속 각기 다른 높이를 지닌 삶들을 톺아보며 우리는 스스로의 위치를 자연스레 가늠하게 되고 다른 지점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러한 문학의 속성을 깊이 고민한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만듭니다.
작가의 삶이 마치 문학같습니다. 한 번쯤 읽어보셔요.
본명은 로맹 카체브(Roman Kacew). 1914년 5월 8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무명 연극배우 니나 카체브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유태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피해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지로 이주하였고, 13세 때부터 프랑스 니스에 정착해 성장했다. 1934년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으며, 이듬해인 1935년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1935년 2월 15일 단편 <폭풍우>가 문예지 《그랭구아르(Gringoire)》에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프랑스 공군의 로렌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하게 되었다. 종전 후에는 공적을 인정받아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장군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무공 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로맹 가리(Romain Gary)라는 이름을 사용해 집필했던 첫 장편소설 <유럽의 교육(Education europenne)>을 1945년 발표, 프랑스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30세 때 패션잡지 《보그(Vogue)》의 편집장이었던 레슬리 블랜치와 결혼한 뒤, 1945년부터 프랑스 외무부에서 대사 서기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 외교관으로 불가리아, 스위스, 페루, 볼리비아 등에서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해 왔다. 그 결과 1956년 장편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였다. 또 같은 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프랑스 총영사관 총영사로 발령되었다. 로맹 가리는 미국에서 생활하며 1958년 자신의 소설 <하늘의 뿌리>를 영화화한 작품 <천국의 뿌리(The Roots of Heaven)>의 각색에 참여하면서, 할리우드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1959)의 여주인공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이콘이었던 미국 여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 1938~1979)를 만나게 되었다. 진 세버그와 동거를 시작하며 레슬리 블랜치와 이혼한 로맹 가리는 1961년 외교관직을 사임했다. 1963년 49세의 나이로 24세 연하의 진 세버그와 재혼한 그해 7월 아들 알렉상드르 디에고 가리가 태어났다.
로맹 가리는 작가로서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왔는데, 1960년 장편 <새벽의 약속(La promesse de l'aube)>을 출간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자신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으로 리투아니아 빌나, 프랑스 니스에서의 생활 등 어린 시절의 경험을 그려낸 자전적 소설이다. 특히 로맹 가리가 성취해야 할 미래상을 예견했던 어머니 니나 카체브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후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를 통해 로맹 가리는 1962년 미국에서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페루의 리마 북쪽 해안으로 날아와 떼로 죽어가는 새들과,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63년에는 전처 레슬리 블랜치를 모델로 한 장편소설 <레이디 L(Lady L.)>가 프랑스에서 발간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68년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로맹 가리가 각본ㆍ연출을 맡고, 아내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1968)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외설적인 내용으로 상영 금지 처분을 받고, 진 세버그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 급진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했던 진 세버그가 FBI(미 연방수사국)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으면서, 로맹 가리와 갈등을 빚었고 1968년 이혼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로맹 가리는 1970년 인종차별과 이념 대립으로 인한 폭력성을 비판하는 내용의 장편 <흰 개(Chien blanc)>를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임신 중이었던 진 세버그의 아이를 두고 과격파 흑인민권운동단체인 블랙팬서(Black Panthers) 지도자의 아이라는 언론의 악의적 루머가 퍼졌고, 충격을 받은 진 세버그의 자살 시도로 딸 니나 하르트 가리가 태어나자마자 2일 만에 사망하기도 했다. 1972년 로맹 가리는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감독한 영화 <킬(Kill)>에서 다시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며 그녀의 재기를 도와 주고자 했으나,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로맹 가리는 영화계를 떠나게 되었다.
점점 고루한 노년의 작가로 평단의 외면을 받게 된 그는 '포스코 시니발디(Fosco Sinibaldi)', '샤탄 보가트(Shatan Bogat)' 등의 가명으로 <비둘기를 안은 남자>, <스테파니의 얼굴들> 등의 소설을 발표하곤 했다. 마침내 60세였던 1974년 에밀 아자르(Emile Ajar)라는 필명으로 장편 <그로칼랭(Gros-Calin)>을 출간, 평단의 찬사를 들으며 떠오르는 신예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1975년 에밀 아자르의 두 번째 소설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은 그해 공쿠르상을 수상하였고, 이로써 로맹 가리는 한 작가에게 평생 한 번밖에 수여되지 않는 공쿠르상을 유일하게 두 번 수상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1976년 <가면의 생(Pseudo)>에 이어 1979년 <솔로몬 왕의 고뇌(L'angoisse du roi Salomon)>까지 4편의 소설을 출간해, 천재 작가의 탄생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로맹 가리는 철저하게 에밀 아자르의 신분을 숨기며, 2개의 이름으로 번갈아서 작품을 발표하지만 로맹 가리로서의 작품은 여전히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실종되었던 진 세버그가 1979년 9월 8일 파리 근교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약물중독이었으나 로맹 가리는 FBI의 개입을 주장하며 기자회견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 후 마지막 작품으로 <연(Les cerfs-volants)>(1980)이 출간되었지만 문단에서는 로맹 가리의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결국 1980년 12월 2일 로맹 가리는 파리의 자택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서 '결전의 날'을 비롯해 사후 1년 뒤 1981년에 발표된 로맹 가리의 유고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Vie et mort d'Emile Ajar)>을 통해서,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맹 가리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익명성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 문학계를 넘어 전 세계에 큰 파문을 남기고 떠났다.
[1] 첫 번째 질문
로자와 모모는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로자는 유태인, 모모는 회교도이죠. 이 두 종교는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갈등, 나아가 죽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다른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고 구사할 줄 압니다. 로자는 회교도의 언어로 모모에게 되묻기도 하고 모모는 유태인들의 기도문을 함께 외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두 사람의 종교를 다르게 설정했을까요? 회교도와 유태인을 한 집에 살게 하면서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2] 두 번째 질문
<La vie devant soi>, ‘여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앞의 생>이라고 번역되어 출판되었지만 분명 ‘여생’과 ‘자기 앞의 생’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차이를 생각케 합니다. 사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자신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生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스스로가 앞으로 겪게 될 生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앞으로 남은 생이라고 못 박았지만 책 속 이야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이 수북의 존재이유인 것처럼 한 번쯤 고민해볼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신은 소설 속 生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계신가요?
[3] 세 번째 질문
현재의 나이대로 살고 있는 당신이 알고보니 4살이나 더 많은 나이의 사람이었다면 각자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