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도서/두 번째 수북

자기 앞의 生(로맹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복길 2016. 11. 15. 03:17

번 모임의 테마는 "이야기"입니다!





선정 이유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며 다시금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막연한 동의를 얻은 느낌입니다. 삶이란 높낮이와 상관없이 그 보편성을 관통하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다간 평생 그게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게 될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문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학 속 각기 다른 높이를 지닌 삶들을 톺아보며 우리는 스스로의 위치를 자연스레 가늠하게 되고 다른 지점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러한 문학의 속성을 깊이 고민한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만듭니다


작가의 삶이 마치 문학같습니다. 한 번쯤 읽어보셔요.






[1] 첫 번째 질문


로자와 모모는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로자는 유태인, 모모는 회교도이죠. 이 두 종교는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갈등, 나아가 죽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다른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고 구사할 줄 압니다. 로자는 회교도의 언어로 모모에게 되묻기도 하고 모모는 유태인들의 기도문을 함께 외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두 사람의 종교를 다르게 설정했을까요? 회교도와 유태인을 한 집에 살게 하면서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2두 번째 질문


<La vie devant soi>, ‘여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앞의 생>이라고 번역되어 출판되었지만 분명 여생자기 앞의 생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차이를 생각케 합니다. 사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자신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스스로가 앞으로 겪게 될 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앞으로 남은 생이라고 못 박았지만 책 속 이야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이 수북의 존재이유인 것처럼 한 번쯤 고민해볼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신은 소설 속 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계신가요?

 



[3] 세 번째 질


현재의 나이대로 살고 있는 당신이 알고보니 4살이나 더 많은 나이의 사람이었다면 각자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벌금납부로써 속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