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우리는 총 4개의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논문이 아닌) 문학 작품을 읽은 만큼, 저는 '형식'이나 '제한' 같은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자유롭게, 본인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적어주세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1] 우리는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었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아마도 많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느낌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 곳에 모두 기록해둡시다. 간단하게 말해, 독후감을 써보는 것이지요. 정해진 형식은 없습니다. 책의 줄거리나 주인공에 대해 쓸 수도 있고, 책의 형식에 대해 쓸 수도 있으며, 혹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에 대해 쓸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매우 다양한 것들에 대해 느끼고 생각했다면, 그 모두에 대해 쓰셔도 좋습니다. 본인이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담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이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남자처럼, 나의 몸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2016년 3월 11일, 나의 몸은 21년 4개월 14일을 살았다. 이렇게 써보니 참 짧은 시간이다. 해가 지나 나이를 먹은 줄 알았는데, 내 몸은 아직 이십일 년의 세월을 견뎠을 뿐이다. 내 몸과 정신의 이 괴리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일까 생각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 기억에 남았던 구절들을 쭉 적어보았는데, 정말 모두 '몸'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당연하겠지, 이건 '몸의 일기'니까. 근데 나는 왜 이 구절들 모두가 '몸'의 일기라는 것에 놀랐을까? 그건 아마, 이 책을 읽으며 '몸'이라는 요소보다 가상의 인물인 남자의 생각을 엿보는 데에 더 관심이 쏠렸는지도 모른다. 혹은, 몸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는 것에 생소함이 남아 있어서 인지도. 그에게 몸이란 곧 그 자신이었고 그 자신은 그의 몸 자체였다. 적어도 이 일기에서 만큼은. 사실 책을 다 읽고나서야 그의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 몇 글자 보다, 그 자신의 이두박근과 방광이었다. 몸을 들여다보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궁금해졌다.
생각이 무언가에 가로막혀 널리널리 나가질 못한다. 아쉽다. 머릿속의 이야기를 다 담아낼 힘이 없다. 한 인간의 기나긴 인생을 들여다 본 후에 내 이야기를 하는것에 무기력을 느낀다. 살아가야 할 날들에 괜한 두려움이 생긴다. 그처럼 몸과 동거하며 살아가는 일을, 그런 생각은 팔십세가 다 되어서야 조금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는 걸까. 그전엔 어림도 없는 걸까.
[2] 위에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직접 자신의 몸에 대한 일기를 써보면 어떨까요? 이 책에는 몸에 관련된 아주 많은 키워드들이 담겨 있습니다. 목소리, 구토, 자위행위, 손금, 똥, 눈물, 섹스, 노안, 안경, 병, 등등. 이 책에 나온 키워드도 좋고, 새로운 키워드도 좋습니다. 한 개의 키워드를 정하고 그에 대한 일기를 하나 써주세요. 일기를 작성한 날짜도 명시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명심하세요. 내면 일기가 아닙니다!
21세 4개월 14일 2016년 3월 11일
눈이 아프다. 욱신거리기도 하고 뿌얘지기도 하고, 어떨 땐 초점을 잃기도 한다. 허공 속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신을 놓는 일이 자주 생긴다. 대학생이 되면서 렌즈를 끼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사실 안경을 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그 욱신거림은 남아있다. 렌즈를 얼마나 더 낄 수 있을까. 각막을 깎아내는 그 수술을 하면 정말 편할까. 누구는 이재용 아들이 그 수술을 해야 본인도 하겠다 하던데, 정말 그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 날이 언제일까. 하긴,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2연승을 거두는 시대이니 가까운 미래에 기대를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왜 머리카락은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만 자기들끼리 엉켜 드는 걸까. 내 머리통에는 도대체 몇개의 머리카락이 달려있을까. 엉킨 머리를 풀때마다 엄청난 머리카락이 빠지는데 아직도 머리 숱이 검게 많다. 시간이 흐르면 엉킨 머리가 다 빠져 대머리가 되버리고 말 것만 같다.
좋아하는 노래가 가사가 있다. '타버리면 어때요, 다 바스러져 없어질텐데.' 어차피 바스러질 몸, 붉은 기운에 휩싸여 타버려도 좋다는 말. 그 이야기는 몸보다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 한 말일까.
너무나 당연하게 쓰고 있는 나의 팔과 다리. 눈. 코. 입. 얼굴. 손가락. 최근에 당연한 게 무얼까, 당연한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계속하다가 내가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나의 몸을 갖지 못한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졌다. 오만일 수도 있고, 그들에게 나의 호기심과 궁금함이 기분 나쁠 수 있지만. 그런 마음으로 장애학생을 돕는 일에 지원했다. 아직 다리를 못쓰는 그친구와 인사정도밖에 나누지 못했지만, 짧게는 한학기, 길게는 2년 동안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많이 생기면, 나는 더욱 더 내 다리에 대해 내 몸에 대해 이해를 잘 할 수 있게 될까 궁금하다.
21세 4개월 15일 2016년 3월 12일
오늘은 유난히 생리통이 더 심해졌다. 혼이 나갈정도로 아프다. 아, 회의에 가야하는데. 회의에 참여한지 너무 오래되어 꼭 가야했는데. 회의에 가서 이야기할 발표자료도 만들어뒀는데. 포기해야겠다. 그런데 뭐라고 말할까. 왜 못간다고 말해야 할까. 한번도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는 모임에서 '생리통 때문에 못가겠다'라는 말을 내뱉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그 후, 전에 동아리를 할 때 어떤 언니가 동아리 게시판에 오늘 '생리통 때문에 못 가겠다' 라는 말을 쓴 걸 보고 경악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하지, 생각했던 3년 전. 그런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그 말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건 거짓말도 아니고 핑계도 아니었다. 그도 진심으로 오고 싶었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 갑자기 생리통이 너무 심해져 움직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난 왜 그 말에 경악을 했을까. 그리고 왜 나는 지금까지도 생리통 때문에 못간다는 말을 쉽사리 전하지 못해 끙끙 거렸을까. 그래도 이 집단은, 여성의 문제에 대해 이해하는 집단이기에 말했다. 생리통 때문에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고. 처음으로, 내 입밖으로 꺼냈다. 또 한번 느낀다.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행복할지 모르나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고. 그것을 전복하기 위해선, 단순히 너네도 군대 갔다와서 힘든거 맨날 이야기하면서 여자가 생리통 이야기를 꺼내면,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다 라고 말하냐? 수준의 논의가 아니라. 지금까지 나 스스로가 '생리라는 말은 입밖으로 꺼내선 안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깊게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나 먼저 그것이 옳지 않다고, 왜 여성의 몸에 대해 말하는 것에 금기가 가해지냐고 말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뿌리깊게 남성의 몸 위주의 사회를 살아왔다는 것을 함께 인식해야 한다. 그건 단순히, 나 여자니까. 난 생리하니까. 그래 이해해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의 몸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이다.
[3] 독후감도 쓰고, 자신의 몸에 대한 일기도 써보았습니다. 몸의 일기, 직접 써보니 어떠셨나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내면에 대한 일기가 아닌 몸에 대한 일기도 쓸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면 일기와 몸의 일기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내면 일기와 몸의 일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우리가 [1]에서 책에 대해 자유롭게 기술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일기라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기술해봅시다.
왜 한번도 나의 몸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매일 거울로 내 모습을 들여다보면서도 내가 신경쓰는 것은 내가 보는 나 가 아니라, 남이 볼 나에 맞춘 나의 몸이었다. 나의 몸이라는 건, 나의 존재, 나의 살아감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남과 만나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다른 이가 없다면(그게 여자든 남자든, 어쨌든 타인.) 나는 옷을 입지도 않을 것이고 얼굴에 무언갈 칠하지 않을거라 확신한다. 몇 달 전 필라테스를 시작하며 나지막히 들었던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더 구체화 되었다. 내 존재를 내가 더 확신할 수 있는 건 나의 몸이라고 나의 정신이 아니라. 내 몸. 나는 일기를 쓰진 않는다. 글쎄 일기라 부를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언가 연결되는글감이 떠올랐을 때 글을 쓰긴 한다. 대부분이 나의 생각, 내면에 관련된 것이다. 가끔 온전히 내면에 집중되어 쓴 일기를 볼 때면 고개가 갸우뚱 해질 때가 있다. 이 말들이 진정 나의 말일까. 말이라는 건 남에게서 얻어온 것이 아닌가. 이 말은 저기서 끌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 나의 것은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들. 그러다 최근엔 그런 생각도 했다. 가장 중요한건 나, 이 몸뚱아리가 이 곳에 앉아있다는 사실이라고. 그래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철학자 김상봉의 유학시절 옆방에 살았다던 그 소냐라는 여고생이 했다던 나는 임신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진실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
[4] 마지막으로, 몸, 마음, 생각, 환경, 행동의 관계에 대한 자신만의 글을 작성해주세요. 이 5가지 키워드 간의 관계에 대해 적어주셔도 좋고, 특정한 키워드 몇 개를 선정하여 그 관계를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또는 이 외의 다른 키워드와 갖는 관계를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다만, '몸'이라는 키워드는 꼭 들어가야합니다 (우리는 '몸의 일기'를 읽었으니까요). 글의 종류는 어떤 것이든 상관 없습니다.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고, 에세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몸과 생각, 마음.]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밝은 눈으로 바라볼게 / 어둠이 더 짙어질수록 / 인정할 수 없는 모든 게 / 사실은 세상의 이치라면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타버리면 어때요, 다 바스러져 없어질텐데. 나 안돌아가요 여기 남겨두세요.
(검정치마, Hollywood)
내가 요 몇주간 가장 많이 들은 두 곡이다.
작년 일을 그만두면서 '높은 마음'을 갖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낮은 몸에 갇혀있는 내가, 무슨 생각을 그러니까 이상을, 열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 가장 열심히 한 것은 끝없이 설거지를 하고 술을 나르고 음식을 나르는 아르바이트와 한시간 동안 아무 생각 할 수 없는 필라테스 였다. 그러니까, 내 몸이었다. 생각에서 멀어져, 이상과 열망에서 멀어져 내 몸에 집착했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토익 공부'에 집착했다. 매일같이 단어를 외우고 리딩과 리스닝을 했다. 영어 공부나, 아르바이트나,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엔 소파나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다 보았다. 음악은 듣지 않았다. 그 시기, 책도 많이 읽었지만 정말 그냥 읽었을 뿐이다. 생각을 할 힘이 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영어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갔다. 공부를 하다 배가 고파 지하 구내 식당에 내려가 라면을 시켰다. 아침에 김밥을 사갔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라면과 김밥을 먹었다. 그 때 내 귀에 꽂은 것은 라디오 였다. 음악을 듣지 않던 내가 유일하게 듣던 심야식당, 이라는 라디오 였다. 크리스 마스 즈음이었던 것 같고 라디오에서는 블루노트 버전 캐롤 앨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루노트의 캐롤과 구립도서관의 지하 식당이라니. 거기다가 그걸 먹고 있는 내 모습은 검은 뿔테 안경에 머리는 떡지고, 초록색 패딩을 껴입은 이십대 초반의 여자 였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것이 부조화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평화롭다 느꼈다. 나는 왜 평화로왔을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이상도 꿈도, 일말의 계획도 없던 내가 왜 그 순간 평화를 느낄 수 있었을까.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꿈도 계획도 없지만 이 곳에 앉아 살아 숨쉬고 있구나. 이 몸뚱아리가 이곳에 있구나. 아 평화롭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 말하기엔 거창하고, 나 자신을 나의 어떤 꿈, 다가오지 않은 미래와 이상이 아니라 이 곳에 앉아 라면을 먹는 몸으로 인식하는 경험은 나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당시엔 명확하지 않았지만, 이 경험에 대한 감상을 길고 긴 사연으로 남겨둔 것을 보면 아마 그때의 나도 어렴풋이 짐작했으리라. 그 시기가 지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다시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정신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많이 들었던 곡이 위에 말한 저 두 곡이다. 높은마음과 할리우드. 내 생각엔, 둘 다 몸 보단 마음을 중요시하는 노래다. 지금 내가 중요하다 하는 이 마음은, 몸의 존재를 인식한 후의 마음이다. 어딘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게 아니라 이 몸 속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나의 마음이다. 내 이름이 김민석이 됐든, theora가 됐든, 스푸가 됐든 그냥 이 글을 뚜닥 거리고 있는 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 인식이, 이 차이의 발견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