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식의 배반, 양식의 딜레마> <자본주의가 종교를 만날 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믿음이고 돈의 추구는 상식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돈이 곧 종교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가져야할 양식, 우리 사회가 가져야할 양식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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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속의 국민들을 유권자가 되지 못하는 소비자라는 말로 명명한 것(p.40)이 인상깊었다. 민주주의는 없고 돈주주의만 있다는 말도 있다. 인간은 과거부터 끊임없이 그들 자신을 탐구하고, 그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것들을 만들어 내왔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는 아테네의 폴리스 이후 없었다. 항상 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거에 ‘출생신분’이었다면, 지금은 ‘돈’으로 바뀐것일 뿐. 그마저도 우리나라에서는 ‘출생신분’이 곧 ‘돈’을 의미하므로 역사가 나선형으로 진보한다는 둥, 인간은 발전한다는 둥의 말은 쉽사리 믿기 어렵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도 마찬가지다. 전체 사회가 이미 돈의 계급으로 점철되어있는데, 대학이라는 사회가 그걸 피할리 만무하다. 진격의 대학교(오찬호,문학동네,2015)에서 저자는 대학을 무감의 공간이라 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돈’이라고 말한다.
대학은 '무감'을 만들어내는 곳이기 이전에 '무감' 그 자체다. 공감해야할 것은 단 하나, 바로 '돈'이다. 돈이 흘러가는 곳에, 돈이 나오는 곳에 코를 박아야 한다. 대학 스스로 기업에 머리를 숙였다. 몇몇 정량화된 지표에 근거하는 대학평가가 대학의 브랜드 가치를 결정하자, 대학은 먹어서는 안 될 옥수수사료를 꾸역꾸역 먹으며 '환상의 마블링'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대학이 기업의 하소연을 귀담아듣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대학 스스로가 기업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 이 짜증나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적응하는 것 뿐이다.
대학은 교육릴레이의 마지막 주자다. 애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경주이지만 마지막주자는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을 향해 보란듯이 진격한다. '무감'을 만들어내고, '영어'를 숭배하고,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하고, '비판'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학에는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술만 가득하다.
그가 말한다. 이 짜증나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적응하는 것 뿐이라고. 나는 머리가 아팠다. 내가 속한 이 작은 사회, 대학 더 나아가 대한민국. 그리고 이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건 대한민국만의 문제도 아니니 내가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지구의 문명사회. 이 곳에서 나는 돈을 숭배하며 ‘상식적인’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 때 송곳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수인이 했던말. “그게 됩니까? 전 안됩니다.” 그래 나는 못하겠다. 그렇게 ‘상식적인 인간’으로는 못살아가겠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한 간단한 나의 현실들부터.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차츰 마음이 편해졌고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 할지 가닥이 잡혔던 것도 같다. 결국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이렇게 그지같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와 개인들은 무감하고,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며,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피지배자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가 그 자신의 고통을 묻지않고 꺼내보이고, 치유하고 바꿔나간다면 종이쪼가리 하나 밖에 안되는 ‘돈’보다는, 그보다 더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 어쩌면 무게가 전혀 나가지 않는 ‘가치’가 더 중요한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고 소비자가 아닌 유권자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2. <문제적인, 너무나 문제적인>
최근 몇 년 동안 섹스와 연애를 주제로 한 예능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모았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섹스가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닌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하나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이 다소 과해, 너무 가벼워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함께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섹스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불타는 감정의 발현이 아니었습니다. 권위주의적 사회에서의 섹스는 도덕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그것이 가정 내의 탈성애화로 이어져 결국 섹스를 위해 가족구성원을 이루는 개인들은 외부세계를 전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성을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개개인의 성(sex:생물학적 성)을 지키기 위해 혹은 개개인의 섹스를 수호하기 위해 가족 안으로 과감히 그 단어를 밀어 넣는 것은 살짝 어렵게도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가족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섹스를 지켜주는 것, 사회적 최소단위인 가족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 이 두가지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굳이 그런 논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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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야기를 할 때, 외국의 사례를 마구 들여오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지만 딱 이 타이밍에 떠오르는 사례가 있어 하나 이야기해보려 한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청년들에게 지원되던 주택지원정책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청년들이 시위를 벌인적이 있었다.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나의 포스터를 만드는 데 그것이 바로 부모님이 자고 있는 침대 위에서 남녀가 섹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주택지원정책이 축소된다면 부모님 사이에서 섹스를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가족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역할이 나뉘어있고 그것의 변화가 없는 안정적인 상태, 그것이 가족이 온전히 유지되는 것인가? 나는 우리가 가족을 파괴할 수 없다 라고 보는 것이 또 하나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내가 말한 프랑스의 시위 전단에서처럼 부모님이 자는 침대위에서 섹스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프랑스의 청년들 또한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책에서 나온 58년 개띠들의 가족상처럼 공감이 없고 서로의 일에 대해 모르는 그런 ‘가족’, 우리나라의 평범한 그 가족의 틀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있나 의문이다.
즉 나의 의견은, ‘가족’이라는 견고해보이고 보수적인 틀을 굳이 유지해나갈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감수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 결국 이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은 우리가 엄마,아빠,아들,딸 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이미 성인이 된 청년들이 자신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국내 주택 문제도 한 몫 한다.
3. <인정받고 싶은 당신> <배운 괴물들의 사회>
선거철이 다가왔습니다. 텔레비전에는 각종 토론프로그램들이 이전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크고 작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정치인들은 그야말로 정치적 발언들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정당은 다른 어떤 것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라고 목 놓아 외치고 성장만이 살길이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장은 과연 무엇일까요? 책에서 말하는 성숙으로 가는 필수적 단계일까요? 아니면 그저 과거와 같이 사람들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조용히 잠들어버릴 거라는 믿음 때문일까요? 이 사람들이 성숙이라는 단어를 염두 해두긴 하는 건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가운데 서민 중 한명인 우리들은 성숙한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성숙한 사회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성숙한 사회는 개인들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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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고 은수미 의원이 필리버스터 마지막에 말한 것처럼,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난주 이야기했던 여러 가지 권리들, 그 권리들을 누리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밥만먹고 사는, 혹은 그것도 어려워 아등바등하는 국민이 대다수인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먹고사니즘, 이상의 것을 꿈꿀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성숙한 사회이다. 사회가 개인을 바꾸는 것일까. 그렇게 되는 사회는 분명 좋은 것은 아닐거다. 개인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사회로 갈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4.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세상물정에 대해 생각하고 바라보려 애쓰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과연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요? 누구도 하려하지 않는 생각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꾸준하고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가지는 힘이 무엇일지 길게 혹은 간단하게 보여주세요.
어려운 질문이다. 사실 알 수 없다. 내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너가 그렇게 관심 갖고 움직인다고 변할 세상이 아니라 말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때도 서해훼리호가 침몰했을때도 그랬다고, 그러니까 그런 슬프고 어쩔 수 없는 ‘사고’에 마음쓰지도 움직이지도 말라고. 변할 세상이었으면 진즉 변했을 거라고. 예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쓰고 움직였다고. 그런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그냥 가만히 니가 할 일이나 하라고. 그 이야기에 많이 슬펐다. 민중으로서의 삶은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눈물이 났다. 그래도 나는 눈을 크게 떠야한다고, 생각하고 말했지만. 지금 이 순간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선을 꾸준히 유지하는 힘이 있냐고?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니냐고? 시선을 유지하는 건 힘이 있기 때문에, 혹은 힘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앞서 말한 것처럼 시선을 거둘 수가 없으니까, 그게 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혹은 나도 그게 되는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