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theora

패싱

theora 2021. 12. 18. 23:43

1. 클레어에게 아이린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자신이 그리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문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클레어는 왜 아이린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했을까? 그에게 아무런 즐거움과 행복을 주지 못했던 세계인데 말이다. 그저 클레어는 평범하고 단순하고 안정적인 자신의 삶이 지루했던 것 아니었을까? 그 지루함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한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 정도는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 정도가 아니었을까? 클레어는 오래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란 게 있었을까? 어쩌면 클레어의 죽음은 그 스스로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2. 과도하게 안정된 삶에 집착하는 아이린이 이해가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이상적인 것 처럼 보였다.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견디는 인종 차별이 버거워 브라질로 떠나고 싶어했던 남편을 어떻게든 뉴욕에 붙잡아두려고 하는 마음, 인종 차별이 만연한 도시에 살면서도 인종 차별을 모르고 자라길 바라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 그 마음들을 견디는 아이린의 삶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 자신 스스로가 무엇이 되기 위해 '행세'하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애씀이 안타까웠다. 아이린이 클레어에게 매혹되면서도 끝없이 혐오했던 건,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것을 선택하여 사는 삶에 대한 설움이 아니었을까.

 

3. 무언가가 아닌 것 처럼 행동하는 것. 그 마음이 왠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발언이 날아든다고 해도 못 들은 체 하는 것. 처음에는 마음이 괴롭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안에 숨어있는 본질을 결코 숨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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